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진중권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이 나라에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애국자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애국자가 있다.”


언젠가 이준석씨에게 들은 얘기다. 그는 지금 새누리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서 이 대목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그의 감동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미합중국의 국민은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든, 그 전쟁에 반대하든 ‘애국자’가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 때마다 ‘빨갱이’ 아니면 ‘매국노’가 되어야 한다.


인구 절반의 빨갱이에, 나머지 절반은 매국노라면, 도대체 이 나라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대로부터 국민 될 자격을 박탈하려 드는 걸까? 


나는 ‘국민 후보’인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 

물론 문재인-안철수-심상정이 함께 하는 정부만이 이 나라를 미래로 이끌 수 있으며, 

박근혜-이회창-이인제가 함께 하는 정권은 이 나라를 과거로 퇴행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은 당연히 나와는 정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 만큼은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아니, 그들의 마음이 어쩌면 나의 것보다 더 뜨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부터 “이 나라에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애국자들과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애국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하자.


언제나 보수당만을 지지하는 어르신들의 생각은 내게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분들은 전쟁을 겪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광주의 상처를 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듯이, 

그 분들 역시 직접 경험한 전쟁의 외상을 평생 안고 살아오셨고, 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실 게다. 


그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의 유세장에 모인 어르신들은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계셨다. 

젊은 세대는 그 분들이 우리의 미래를 흘러간 과거에 묶어 놓는다고 원망하고, 심지어 그들의 고리타분함을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투표참여율로 드러나는 그 분들의 애국적 열정만은 존엄한 것이어서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선거 날 박근혜 후보를 찍으려는 부모님을 효도관광 보내 드리겠다’는 말은 행여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든,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투표에는 모든 애국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설사 지지하는 후보가 나와 다르더라도, 집안의 나이 드신 애국자들과 함께 투표장에 나가자. 


나를 부끄럽게 하는 분들이 또 있다. 

인도에서, 멕시코에서, 유럽에서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심지어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20시간, 40시간을 걸려 투표장으로 나간 재외국민들. 

그 먼 시간을 들여 투표장으로 향하던 그 분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리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의 온도로 서로 경쟁하는 마당. 


우리의 선거도 이제 그런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비판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서로 의심하지 말자.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승자에는 영광을, 패자에게는 명예를 주자.


92%에 달한다는 60대 이상의 투표 의향. 그걸 보고 푸념하는가? 

안도현 시인의 말대로, 어차피 인생은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그 분들은 전쟁과 산업화의 과정에 제 한 몸 다 태워 기꺼이 연탄재가 되셨다. 재가 되어서도 아직 저렇게 뜨겁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